
🖋️ 줄거리
미자는 중학생 손자를 홀로 키우며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치매를 진단받은 미자는 문화센터의 시 창작 강좌를 등록하며, 치매 예방의 수단으로 '시를 쓰는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손자가 집단 성폭행 사건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합의금을 위한 자리를 만들고 미자 역시 참석하지만, 미자는 그 자리가 탐탁지 않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이미 자살한 여학생의 ‘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되짚으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2003~2008)'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개봉했던 <살인의 추억(2003)>과 <올드보이(2003)>, 만화 원작의 <타짜(2006)>와 한국형 스릴러 영화 <추격자(2008)>까지, 그 시기 한국 영화가 남긴 유산은 흥행의 기록과 같은 최루탄스러운 것보다 값진 것이었다. 할리우드를 포함한 상업 영화를 공업적으로 생산하려는 흐름에 수렴할 필요가 없다는 당시 영화들이 남긴 ‘맹렬한 전언’이 그때나 지금이나 불씨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주목하는 것은 이 시기의 영화들이 선보였던 유수한 상과 ‘불씨’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이창동의 영화는 늘, 장렬히 산화하는 정치적 구호로 끝맺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육지로 잡아 올려져 세계의 그림자에서 퍼덕대는 물고기들을 조명할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부조리를 향한 연민에 대한 동경에 있으리라. 그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뜨거움은 주변을 보듬고 살피는 '휴머니스트적 뜨거움'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본 영화에서도 이창동은 치매를 겪는 노인 ‘미자’를 조명한다. 그녀는 딸이 맡긴 손자를 간병인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돌보고 있다. 꽃과 자연,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찾아온 소식은 충격적이고 가혹했다. 단지 사춘기를 겪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손자가, 얼마 전에 ‘자살한 여학생’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자가 혐오스럽지만, 가해자들의 부모가 모인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은, 치매와 함께 그림자처럼 그녀의 발밑에서 이글거리며 출렁였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그 ‘가해자 부모들의 모임’에서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빈곤한 노인’이기 때문에, 합의금과 관련한 이야기에서 소외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사건을 무마하려는 방법보다, 치매를 극복하기 위해 등록한 시 창작 교실에서 들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시를 쓰는 방법’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간병하던 노인에게서 성희롱을 당한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와 처음으로 피해자의 시체가 떠내려간 강가로 향했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펜을 잡고 비를 맞으며 시를 썼다. 이윽고 자신을 성희롱했던 노인과 성관계를 맺었고, 이를 빌미로 손자의 합의금이 될 500만 원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주어진 고통은 끝맺음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에 가담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대상으로서 쫓기고 있는지, 딸이 맡긴 손자도, 손자를 방치하는 자기 딸조차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손자를 고발하고, 젊은 형사의 손에 끌려가는 손자의 뒷모습을 보며 늙은 형사와 배드민턴을 친다.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그녀의 시와 함께.
시를 쓰지 못하던 그녀가, 추락을 결심하고서 시를 쓰는 모습은 사뭇 인상적이다. 조금씩 단어를 잊어가던 그녀의 눈은 아름다움을 좇았지만 공허해 왔다. 지갑 같은 일상적인 단어도 잘 기억나지 않았고, 꽃과 사과 따위는 시를 쓸 수 있게 하지 않았다. 아무런 ‘부조리’가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열망과 욕구 없이 쓰는 글은 보통이 종잇장을 까맣게 만드는 역할 이상을 해내지 못하지 않는가. 사과를 쓴다고 해서, 꽃을 쓴다고 해서 시가 아닌 것이 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시가 단순히 수사법과 미사여구로 이루어진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합의라는 행위를 통해 세상에서 잊히려 하는 ‘피해자’를 세상에서 죽어가는 ‘시’로 옮길 때부터 시작됐다. 이어서 그녀는 그곳에서 ‘미자’라는 이름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아들을 맡기고 오지 않는 딸과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주변인들 속에서 망각되고 ‘미자’를 말이다. 부조리란 침묵의 균열에서 비로소 자신을 응시한 것이다.
그렇게 영화 <시>는 현대 사회에서 죽어가는 것과 죽이는 것들을 기록한다. 노인이 되어 화자의 입지를 잃은 미자의 모습, 시가 죽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시인들, 탈속적인 목적을 지닌 일과 멀어지고 주체가 되는 일에 미숙해진 존재들을. 타자의 관점에 있었기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위로할 수 없었던 잊힌 것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쓴다. 망각을 기다리는 흰 종이에 연민을, 비릿한 비 냄새를 통해 쇠창살처럼 들어선 갈비뼈들을 세차게 부수고 마음에 도달하는 잊혀 가는 것들을 향한 위로의 문법으로. 투박한 손길로 써 내리는 이창동만의 문학적 문법으로.
💡코멘트:
영화를 보는 내내 혐오를 감출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대개 돈 때문’이라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이나, 가해자 부모들의 제 자식 감싸기, 간병인과 관계를 맺으려 약물을 복용하는 노인은 끔찍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혐오스럽다. 영화 내내 소극적이었던 미자를 변호할 수는 있겠으나, 그녀의 모든 것을 동정할 수 없음도 사실이었다. 강간이란 중범죄를 저지른 손자를 자기 손으로 직접 고발해야 하는 미자의 입장은 '참여'를 종용하는 문학의 본질과도 꽤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
✅ Editor: KimoKimo
📅 2024년 04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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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이창동 <아네스의 노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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